광화문 광장을 지키는 두 마리의 석상, 해치(獬豸). 정의와 진실을 상징하는 이 상상 속 동물은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영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해치는 시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거짓말하는 자를 뿔로 들이받았다고 합니다. 진실만을 선택하고, 정직한 것만을 수호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호주에도 한 마리의 ‘해치(HATCH)’가 있습니다. 다만 이 해치는 석상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크리스 해처(Chris Hatcher), 애칭 ‘해치’. 50년간 포도밭과 오크통을 지키며, 와인의 진실만을 추구해온 호주 와인의 구루(Guru 릴짱 ) 같은 남자죠.
광화문의 해치가 정의를 가려냈다면, 호주의 해치는 위대한 와인과 평범한 와인을 가려냈습니다. 50년간 호주의 위대한 와인을 양조하고 75번 이상의 국제 와인 대회를 심사하면서요. 그의 혀는 지난 세월을 거치며 하나의 기준이 됐고, 그의 와인을 양조하는 손길은 호주 와인의 진정성을 나타내는 아이콘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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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해태상. 해태는 해치의 와음이다.




혈관에 흐르는 와인, DNA에 새겨진 운명
1975년, 처음 와인 산업에 뛰어든 크리스 해처는 가족의 가풍을 어긴 이단아에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가까웠습니다. 엄격한 감리교 집안에서 자란 그에게 와인은 금기였기 때문입니다. 가족 누구도 신앙을 이유로 알코올을 즐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처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양조와 발효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애들레이드 대학에서 미생물학과 유기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합니다. 그 릴게임가입머니 렇게 그의 수십년 간의 와인 역정(歷程)이 시작됩니다.
해처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신이 와인메이커가 된 것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외증조할아버지인 알프 베시(Alf Vesey)가 1883년부터 1952년까지 무려 69년간 호주 와이너리의 백본(back bone·뼈대)이라 불리는 ‘펜폴즈(Penfolds) 릴짱 ’에서 일했으며, 그 중 거의 50년을 마스터 와인메이커로 재직한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알프 베시가 바로 호주 와인의 전설, 막스 슈베르트(Max Schubert)의 멘토였다는 점입니다. 막스 슈베르트는 호주 와인의 아이콘이자 세계적 명성을 얻은 펜폴즈 그랜지(Penfolds Grange)의 창시자입니다.
해처는 “와인 양조는 내 DNA에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연처럼 시작된 와인과의 인연이 사실은 3대에 걸친 가업의 부활이었던 셈입니다. 그는 외증조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자신의 와인 중 하나를 ‘베시 쉬라즈(Vesey Shiraz)’라고 명명했습니다. 맥라렌 베일의 벨벳 같은 과실미와 우아한 탄닌이 어우러진 이 와인은, 3세대에 걸친 장인정신의 헌사인 셈입니다.



크리스 해처가 지난달 18일 한국을 방문해 자신의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전형민 기자]




울프 블래스에서의 35년, 황금빛 전성기
1987년, 크리스 해처는 독일 출신의 전설적 와인메이커 볼프강 블래스(Wolfgang Blass)의 권유로 울프 블래스(Wolf Blass)에 합류합니다. 울프 블래스는 남호주를 넘어 호주를 대표하는 대형 와이너리 브랜드입니다. 전세계에 호주 와인을 알리는 것은 물론 대중화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해처는 이곳에서 처음엔 화이트와 스파클링 와인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곧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와인들은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10년간 39개의 트로피와 218개의 금메달. 숫자만 나열하더라도 왠만한 사람은 꿈꾸기도 어려운 수준의 성과를 거둬들입니다.
울프 블래스 합류 9년만인 1996년, 해처는 수석 와인메이커로 승진해 호주 와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의 총괄 아래 울프 블래스뿐 아니라 펜폴즈, 윈스(Wynns), 콜드스트림 힐스(Coldstream Hills), 솔트램(Saltram), 페퍼잭(Pepperjack), 데빌스 레어(Devils Lair) 등 호주를 대표하는 와인들이 탄생했는데, 이를 두고 ‘단순히 와인을 만든 게 아니라 호주 와인의 정체성을 재정의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2008년, 많은 이들이 미쳤다고 말렸던 도전이 있었습니다. 울프 블래스 블랙 레이블을 병당 2000달러가 넘는 세계 최고급 와인 30종과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겨루게 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블랙 레이블이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획득하면서, 해처는 호주 와인이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명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울프 블라스는 지난 2016년 KBO 리그와 후원 계약을 통해 공식 와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역설의 와인, HATCH의 탄생
크리스 해처의 커리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입니다. 런던 국제 와인 & 스피릿 대회(IWSC)에서 세 차례(1992년, 2002년, 2013년) ‘올해의 와인메이커’로, 2020년엔 ‘올해의 레드 와인메이커’로 선정되는가 하면, 또 다른 저명한 와인 대회인 런던 국제 와인 챌린지(IWC)에서도 무려 네 차례(2008년, 2013년, 2016년, 2021년) ‘올해의 레드 와인메이커’라는 영예를 안았죠. 글로벌 와인 업계에서 인정받은 거장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는 또 호주와 영국, 미국에서 75회 이상의 와인 대회를 심사했습니다. 2011년과 2012년엔 퍼스 로얄 와인쇼의 심사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죠. 이는 그의 미각이 단순한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 업계의 기준이 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해처는 2023년 7월7일, 돌연 울프 블래스에서 은퇴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브랜드 ‘HATCH(해치)’를 론칭합니다. 참고로 브랜드명은 자신의 이름에서 기원했습니다. 친구들이 자신을 줄여서 부르던 이름이 ‘해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난 수십년 동안의 빛나는 경력을 하나의 브랜드에 집대성한 셈입니다.
이미 호주 와인 산업에서 대체할 수 없는 지위와 명성을 얻은 그가 왜 굳이 남들이라면 이미 은퇴를 하고도 남았을 나이에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일까요? 그는 자신의 와인에 대한 철학을 담은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각 지역의 최고 품종을 활용해 우아하고 세련된 와인, 젊을 땐 생동감이 넘치고, 숙성하면 더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와인을요.



남호주 와인의 전설, 울프 블라스 와이너리의 모습.



실제로 2023년 빈티지로 출시된 그의 첫 와인들은 각각 남호주 각지의 떼루아를 순수하게 표현하면서도 균형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젊은 것을 넘어 어려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대로 충분히 즐길 가치가 있는 와인, 그 뿐만 아니라 시간을 더 투자하면 점점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와인이라는 설명이 따르죠.

여기서 재밌는 점은 해치 와인이 제 시선으론 역설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시도하고 토착 효모 연구에 몰두하며, 스크루캡과 디암(Diam) 코르크 같은 신기술 도입에도 적극적이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떼루아의 순수성을 누구보다 중시합니다.
실제로 시음해본 그의 와인이 호주 특유의 강건함보다 우아함을 내세웠다는 점도 역설적입니다. 대개 호주 와인의 보편적 떼루아인 직관적이고 힘이 좋은 과실미와 달리 섬세한 부드러움이 기본으로 깔려 호주 와인의 캐릭터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의외성을 선물합니다.
또 ‘해치’라는 그 이름조차 한국어에 한정해 역설적입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동물이니까요.



호주의 살아있는 와인 구루, 크리스 해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 그리고 당신의 잔에도
2023년 첫 빈티지로 출시된 HATCH 라인업은 리슬링과 쉬라즈 각각 2종류씩 총 네 가지 레이블 입니다. 해처는 최근 샤도네 품종으로도 와인을 양조하고 있다며 곧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리슬링이었습니다. 에덴 밸리와 클레어 밸리 두 곳에서 나온 리슬링을 같은 듯 다른 스타일로 양조했는데, 둘 다 거의 무색에 가까울 정도로 투명했고, 10년 이상의 숙성 잠재력이 느껴졌습니다.
에덴 밸리는 라임과 청사과의 시트러스 캐릭터가 강하고, 클레어 밸리는 좀 더 꽃향기와 미네랄이 두드러집니다. 해처는 이들에 대해 “지금 마셔도 좋지만, 5년 후엔 페트롤 노트(휘발류 냄새)와 토스트 향이 더해져 완전히 다른 와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사 밸리와 맥라렌 베일에서 생산된 쉬라즈 두 종도 호주 쉬라즈의 고정관념을 깨는 와인이었습니다. 다른 호주 쉬라즈처럼 파워풀함을 기대한다면 당황할만한 부드러움과 경쾌함이 돋보였습니다. 지금도 좋지만 미래에 숙성된 후가 더 기대되는 와인.
2023년 빈티지를 지금 마시면 젊은 과실의 생동감을, 2035년에 마시면 숙성된 복합미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딱 해처의 양조 철학을 그대로 보여주는 와인이랄까요. 해처는 “지금 마시면 과실미가 폭발하지만, 10년 후엔 가죽과 삼나무, 트러플 향이 피어나는 복합미를 겸비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쉬라즈는 근육질 보디빌더가 아니라 마라톤 선수여야 한다. 장거리를 뛸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주인공 제이크는 “혼자라도 와인 한 병이면 훌륭한 동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제이크는 파리의 밤을 샤또 마고 한 병과 함께 보내죠. 제이크에게 샤또 마고 한 병이 그 밤을 버티게 해준 동무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해치 한 병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해는 다음 날 다시 떠오르고, 해처는 은퇴 뒤에도 다시 포도밭으로 돌아왔습니다. 반세기 동안 호주 와인의 기준을 세운 남자가 늙어서도 은퇴하지 않고, 자기 이름을 내걸어 선보인 와인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제 그와 그의 와인 한 잔 속에 담긴 진실을, 우리가 직접 확인해볼 차례입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