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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보호재 작성일 25-11-16 18:26 조회 10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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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 기자]
한때는 비평가들끼리 서로의 책을 읽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런 때는 지나갔다. 비평이 해설로 위축되었다. 이제 각자가 자신의 감상을 자유롭게 수많은 온라인 매체에 쓰기를 원하고, 비평은 안 읽어도 그만인 시대가 되었다. 남 얘기가 아니다. 나도 다른 비평집을 찬찬히 읽어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김영찬 평론집 <사랑의 혁명>을 읽었다. 평론집에 실린 최인훈과 황정은 작품을 비교하는 글을 읽으면서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에 나오는 혁명의 문제를 떠올렸다(영화 백경릴게임 얘기를 하기 전에 영화 제목에 대한 불만부터 적는다. 언제부터인가 외국영화 제목을 어색한 한국어로 음차하는 게 대세가 되었다. 어색하다. 영화 대사에 나오는 대로 제목을 <끝없는 전투>로 번역하고 <전투>로 약칭한다). 김영찬은 최인훈 소설을 평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한국문학사에는 드물게 혁명을 사유하는 소설이 있다. 예컨대 최인훈의 < 바다이야기합법 회색인>(1964)이 대표적인 사례다. 4·19혁명의 열기가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변질되어가고 모든 것이 막혀버렸다는 좌절과 체념의 분위기가 지식인들을 사로잡던 시절, 최인훈은 <회색인>을 썼다.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에 따르면, 어쨌거나 혁명은 불가피하다. 한국 사회의 열악한 후진성과 낙후된 의식은 혁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도대 바다신2 다운로드 체가 어찌해볼 수조차 없는 참으로 더러운 시대 못난 지역의 주민인 우리는, 시대의 감옥에 갇혀 있으나 탈출은 금지돼 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절벽이다." (김영찬, <사랑의 혁명>)
최인훈은 1960년대 중반에 "모든 것이 절망적인 절벽"이라고 적었지만, 한국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68혁명이 실패한 1960년대 후반부터 유럽도 혁명의 사아다쿨 좌절과 그로 인한 테러리즘의 시대가 열린다. 이른바 좌절한 신좌파의 시대다. 지금은 이름도 낯선 서독의 적군파(Rote Armee Fraktion, RAF),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Brigate Rosse), 일본적군(Japanese Red Army) 등이 테러리즘을 통한 혁명을 내세웠다가 처참하게 실패한다.
1968년 파리, 베를린, 로 모바일릴게임 마 등에서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제국주의·베트남전 반대를 외쳤지만, 근본적인 체제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비폭력을 내세운 신좌파가 현실 정치에 흡수되거나 사라지자, 그중 일부가 폭력 혁명론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1970년대 초반부터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여 은행 강도, 납치, 폭탄 테러 등으로 혁명 자금을 조달하거나 '부르주아 국가의 심장부'를 공격한다. 그러나 대중적 지지 기반을 잃고 점차 비밀 테러 조직으로 변질한다.
이 시대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영화가 던지는 질문
▲ 영화 <원 배틀 어나더 애프터> 스틸컷. 극중 밥(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모습.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시대 배경은 다르지만, 영화 <전투>의 시작이 바로 이런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장혁명단체 프렌치 75에서 폭발물 제조를 담당하는 밥(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은 애인인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와 함께 억류된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급습 작전을 펼친다. 퍼피디아는 작전 도중 군인 스티븐 록조(숀 펜)를 성적으로 모욕한다. 영화는 이어서 프렌치 75가 도심에 연쇄적으로 게릴라식 폭발을 감행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은행을 털다가 퍼피디아는 경비원을 죽인다. 프렌치 75 구성원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혁명이라고 자임(自任)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주관적 자임이 치기 어린 낭만적 관념이라는 걸 체포된 구성원들이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진압군의 압력에 굴복하는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언제나 현실이 관념보다 힘이 센 법이다. 맥락은 복잡하지만, 퍼피디아조차도 배반의 대열에 가담해서 결국 배신자(the rat)가 된다. 시대착오적인 테러리즘이 이 시대의 혁명이 될 수 있는가? 그런 물음을 영화는 던진다.
그래서 이런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자유가 뭔지 알아? 두려움을 잃어버리는 거야. 그 빌어먹을 톰 크루즈가 말했지." 두려움을 버리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도 혁명의 중요한 속성이다. 하지만 두려움을 잃어버리는 일이 신중한 사유와 판단이 아니라 관념적인 자유의 추구에 머문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결과는 파괴적이다. 이런 대사로 표현된다. "혁명하는 놈들은 늘 처음엔 악마와 싸운다고 말하지. 그러다가 나중엔 자기들끼리 싸워." 악마와 싸우다가 자기도 악마가 되어가는 혁명에 대한 비판으로 들리지만, 영화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쉽게 배신하는 자칭 혁명가들이 보여주는 오래가지 못하는 관념적 과격함과 성급함이 초래한 나쁜 결과이다.
<전투>는 자칭 혁명단체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16년을 건너뛰어 우리 시대 시대를 비춘다. 이제는 지친 중년이 된 밥과 고등학생이 된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의 관계가 부각된다. 느닷없이 혁명의 이야기에서 다소 뻔해 보이는 부녀 관계 이야기로 전환한 것처럼 보인다. 밥은 딸을 혼자 키우면서 세월의 무게에 혁명의 기억을 잊었다. 그의 모습에는 아버지의 책임과 사회적 이상 사이의 큰 간극이 스며 있다.
<전투>는 현시대 미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일화를 솜씨 있게 배치한다. 오직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것만을 욕망하는 군인 스티븐 록조와 그가 충성을 맹세하는 인종주의 지배집단의 기괴한 모습, 그런 지배집단이 공유하는 유색인종에 대한 강렬한 혐오, 이민 거부, 자신의 기준에 따른 편 가르기, 상대를 악마화해서 제거하기 등을 <전투>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밥은 윌라를 구출하려는 추격전을 펼친다. <전투>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완결미를 표현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돋보이며, 별다른 충격적 이미지가 없으면서도 사운드와 편집으로 긴박감을 만들어내는 연출도 뛰어나다. 결말 부분에 나오는 자동차 추격 장면은 아날로그 시대 영화의 연출기법을 떠올리게 하면서, 촬영과 편집의 힘을 과시한다. 언뜻언뜻 나오는 코믹한 대사와 장면도 인상적이다. 내가 본 올해 최고의 외국 영화이다(한국 영화로는 <세계의 주인>을 꼽겠다).
혁명의 미덕은 '신중함'과 '치밀함'
▲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극중 세르지오(베니치오 델 토로)의 모습.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하지만 내가 영화를 보고 나서 묻고 싶은 질문은 글머리에 언급한 최인훈과 황정은 소설이 제기하는 물음이다. 이 시대에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어떤 영화평에서는 <전투>에서 부모 세대의 추악한 유산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려받은 윌라가 새로운 세대의 혁명을 예견한다고 지적한다.
일견 동의하지만, 내가 보기에 <전투>가 보여주는 진정한 혁명가는 따로 있다. 윌라의 가라테 스승이고, 밥이 항상 선생(센세)이라고 부르는 인물, 어른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밥이 속한 지역 공동체의 믿음직한 이웃이고 중남미 이민자들의 거취를 돕는 세르지오(베니치오 델 토로)가 그 인물이다.
세르지오는 어지러운 상황을 만나면 허둥지둥하는 밥에게 "파도를 생각하며 침착하라"고 되풀이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 그는 말 그대로 '어른'이다. 나는 세르지오의 모습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미덕으로 신중함(prudence)을 말했다는 스피노자를 떠올린다. 과격함이 혁명의 정신이 아니다. 신중함과 치밀함이 미덕이다. 그래서 김영찬이 황정은 소설을 평하는 이런 대목이 울림이 있다.
"참사로 애인을 잃은 사람들은 탈출할 수 없는 격벽의 진공에 갇혔지만, 그들은 그들이 갇힌 바로 그 진공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하찮게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은 그 하찮음으로 하찮음에 저항하고 있었다. 진공관 안에서 작고 희미한 빛과 신호가 모여 소리가 되듯이, 그들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의 신호는 아마도 그렇게 그들의 신호와 만나 언젠가 증폭되고 소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황정은은 낙관이라는 물신(物神)을 멀리한다. 이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하찮음과 싸우는 하찮은 존재들의 저 작고 사소한 마음의 연대가, 그 희미하게 잔존하는 빛의 연대가 어쩌면 작은 기적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진 않을까 하는 물음이다."
세르지오가 예증하듯이, 우리 시대 혁명의 가능성은 <전투>에서 그려진 모습처럼 그게 어느 편이든 총기와 폭탄으로 '적'을 섬멸하려는 과격함이 아니라, "하찮음과 싸우는 하찮은 존재들의 저 작고 사소한 마음의 연대"에서 움틀 것이다. 그리고 "그 희미하게 잔존하는 빛의 연대가 어쩌면 작은 기적의 시작", 작은 혁명의 시작이 되리라 믿는다. 기자 admin@slotmega.info
한때는 비평가들끼리 서로의 책을 읽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런 때는 지나갔다. 비평이 해설로 위축되었다. 이제 각자가 자신의 감상을 자유롭게 수많은 온라인 매체에 쓰기를 원하고, 비평은 안 읽어도 그만인 시대가 되었다. 남 얘기가 아니다. 나도 다른 비평집을 찬찬히 읽어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김영찬 평론집 <사랑의 혁명>을 읽었다. 평론집에 실린 최인훈과 황정은 작품을 비교하는 글을 읽으면서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에 나오는 혁명의 문제를 떠올렸다(영화 백경릴게임 얘기를 하기 전에 영화 제목에 대한 불만부터 적는다. 언제부터인가 외국영화 제목을 어색한 한국어로 음차하는 게 대세가 되었다. 어색하다. 영화 대사에 나오는 대로 제목을 <끝없는 전투>로 번역하고 <전투>로 약칭한다). 김영찬은 최인훈 소설을 평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한국문학사에는 드물게 혁명을 사유하는 소설이 있다. 예컨대 최인훈의 < 바다이야기합법 회색인>(1964)이 대표적인 사례다. 4·19혁명의 열기가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변질되어가고 모든 것이 막혀버렸다는 좌절과 체념의 분위기가 지식인들을 사로잡던 시절, 최인훈은 <회색인>을 썼다.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에 따르면, 어쨌거나 혁명은 불가피하다. 한국 사회의 열악한 후진성과 낙후된 의식은 혁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도대 바다신2 다운로드 체가 어찌해볼 수조차 없는 참으로 더러운 시대 못난 지역의 주민인 우리는, 시대의 감옥에 갇혀 있으나 탈출은 금지돼 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절벽이다." (김영찬, <사랑의 혁명>)
최인훈은 1960년대 중반에 "모든 것이 절망적인 절벽"이라고 적었지만, 한국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68혁명이 실패한 1960년대 후반부터 유럽도 혁명의 사아다쿨 좌절과 그로 인한 테러리즘의 시대가 열린다. 이른바 좌절한 신좌파의 시대다. 지금은 이름도 낯선 서독의 적군파(Rote Armee Fraktion, RAF),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Brigate Rosse), 일본적군(Japanese Red Army) 등이 테러리즘을 통한 혁명을 내세웠다가 처참하게 실패한다.
1968년 파리, 베를린, 로 모바일릴게임 마 등에서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제국주의·베트남전 반대를 외쳤지만, 근본적인 체제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비폭력을 내세운 신좌파가 현실 정치에 흡수되거나 사라지자, 그중 일부가 폭력 혁명론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1970년대 초반부터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여 은행 강도, 납치, 폭탄 테러 등으로 혁명 자금을 조달하거나 '부르주아 국가의 심장부'를 공격한다. 그러나 대중적 지지 기반을 잃고 점차 비밀 테러 조직으로 변질한다.
이 시대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영화가 던지는 질문
▲ 영화 <원 배틀 어나더 애프터> 스틸컷. 극중 밥(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모습.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시대 배경은 다르지만, 영화 <전투>의 시작이 바로 이런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장혁명단체 프렌치 75에서 폭발물 제조를 담당하는 밥(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은 애인인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와 함께 억류된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급습 작전을 펼친다. 퍼피디아는 작전 도중 군인 스티븐 록조(숀 펜)를 성적으로 모욕한다. 영화는 이어서 프렌치 75가 도심에 연쇄적으로 게릴라식 폭발을 감행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은행을 털다가 퍼피디아는 경비원을 죽인다. 프렌치 75 구성원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혁명이라고 자임(自任)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주관적 자임이 치기 어린 낭만적 관념이라는 걸 체포된 구성원들이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진압군의 압력에 굴복하는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언제나 현실이 관념보다 힘이 센 법이다. 맥락은 복잡하지만, 퍼피디아조차도 배반의 대열에 가담해서 결국 배신자(the rat)가 된다. 시대착오적인 테러리즘이 이 시대의 혁명이 될 수 있는가? 그런 물음을 영화는 던진다.
그래서 이런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자유가 뭔지 알아? 두려움을 잃어버리는 거야. 그 빌어먹을 톰 크루즈가 말했지." 두려움을 버리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도 혁명의 중요한 속성이다. 하지만 두려움을 잃어버리는 일이 신중한 사유와 판단이 아니라 관념적인 자유의 추구에 머문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결과는 파괴적이다. 이런 대사로 표현된다. "혁명하는 놈들은 늘 처음엔 악마와 싸운다고 말하지. 그러다가 나중엔 자기들끼리 싸워." 악마와 싸우다가 자기도 악마가 되어가는 혁명에 대한 비판으로 들리지만, 영화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쉽게 배신하는 자칭 혁명가들이 보여주는 오래가지 못하는 관념적 과격함과 성급함이 초래한 나쁜 결과이다.
<전투>는 자칭 혁명단체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16년을 건너뛰어 우리 시대 시대를 비춘다. 이제는 지친 중년이 된 밥과 고등학생이 된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의 관계가 부각된다. 느닷없이 혁명의 이야기에서 다소 뻔해 보이는 부녀 관계 이야기로 전환한 것처럼 보인다. 밥은 딸을 혼자 키우면서 세월의 무게에 혁명의 기억을 잊었다. 그의 모습에는 아버지의 책임과 사회적 이상 사이의 큰 간극이 스며 있다.
<전투>는 현시대 미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일화를 솜씨 있게 배치한다. 오직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것만을 욕망하는 군인 스티븐 록조와 그가 충성을 맹세하는 인종주의 지배집단의 기괴한 모습, 그런 지배집단이 공유하는 유색인종에 대한 강렬한 혐오, 이민 거부, 자신의 기준에 따른 편 가르기, 상대를 악마화해서 제거하기 등을 <전투>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밥은 윌라를 구출하려는 추격전을 펼친다. <전투>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완결미를 표현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돋보이며, 별다른 충격적 이미지가 없으면서도 사운드와 편집으로 긴박감을 만들어내는 연출도 뛰어나다. 결말 부분에 나오는 자동차 추격 장면은 아날로그 시대 영화의 연출기법을 떠올리게 하면서, 촬영과 편집의 힘을 과시한다. 언뜻언뜻 나오는 코믹한 대사와 장면도 인상적이다. 내가 본 올해 최고의 외국 영화이다(한국 영화로는 <세계의 주인>을 꼽겠다).
혁명의 미덕은 '신중함'과 '치밀함'
▲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컷. 극중 세르지오(베니치오 델 토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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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영화를 보고 나서 묻고 싶은 질문은 글머리에 언급한 최인훈과 황정은 소설이 제기하는 물음이다. 이 시대에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어떤 영화평에서는 <전투>에서 부모 세대의 추악한 유산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려받은 윌라가 새로운 세대의 혁명을 예견한다고 지적한다.
일견 동의하지만, 내가 보기에 <전투>가 보여주는 진정한 혁명가는 따로 있다. 윌라의 가라테 스승이고, 밥이 항상 선생(센세)이라고 부르는 인물, 어른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밥이 속한 지역 공동체의 믿음직한 이웃이고 중남미 이민자들의 거취를 돕는 세르지오(베니치오 델 토로)가 그 인물이다.
세르지오는 어지러운 상황을 만나면 허둥지둥하는 밥에게 "파도를 생각하며 침착하라"고 되풀이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 그는 말 그대로 '어른'이다. 나는 세르지오의 모습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미덕으로 신중함(prudence)을 말했다는 스피노자를 떠올린다. 과격함이 혁명의 정신이 아니다. 신중함과 치밀함이 미덕이다. 그래서 김영찬이 황정은 소설을 평하는 이런 대목이 울림이 있다.
"참사로 애인을 잃은 사람들은 탈출할 수 없는 격벽의 진공에 갇혔지만, 그들은 그들이 갇힌 바로 그 진공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하찮게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은 그 하찮음으로 하찮음에 저항하고 있었다. 진공관 안에서 작고 희미한 빛과 신호가 모여 소리가 되듯이, 그들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의 신호는 아마도 그렇게 그들의 신호와 만나 언젠가 증폭되고 소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황정은은 낙관이라는 물신(物神)을 멀리한다. 이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하찮음과 싸우는 하찮은 존재들의 저 작고 사소한 마음의 연대가, 그 희미하게 잔존하는 빛의 연대가 어쩌면 작은 기적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진 않을까 하는 물음이다."
세르지오가 예증하듯이, 우리 시대 혁명의 가능성은 <전투>에서 그려진 모습처럼 그게 어느 편이든 총기와 폭탄으로 '적'을 섬멸하려는 과격함이 아니라, "하찮음과 싸우는 하찮은 존재들의 저 작고 사소한 마음의 연대"에서 움틀 것이다. 그리고 "그 희미하게 잔존하는 빛의 연대가 어쩌면 작은 기적의 시작", 작은 혁명의 시작이 되리라 믿는다. 기자 admin@slotmeg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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