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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보호재 작성일 25-12-02 17:17 조회 7 댓글 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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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그림을 그릴 때 어떤 기분이 드나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속상했던 일도, 기분 나빴던 일도 어느새 잊히곤 해요. 과학적으로도 그림을 그리는 활동은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림 그리기는 세로토닌과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해 기분을 개선하고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죠. 그래서 많은 화가가 절망의 순간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으며 시련을 이겨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작가가 작품 활동을 통해 스스로 위로받고, 또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져 왔죠. 그림을 감상하는 것 역시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바다이야기릴게임2 고 합니다. 이에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미술관을 찾아 올해 탄생 101주년을 맞은 천경자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천경자 화백을 조명한 전시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찾은 전서진 학생기자와 고가람 학생모델, 정 모바일야마토 서우 학생기자(왼쪽부터).
미술 작품은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그린 개인의 감정을 넘어, 작품이 탄생한 시대의 정치·사회·문화적 배경과 역사를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작품을 통해 작가가 당시 어떤 고민과 질문을 품었는지 유추할 수 있고요. 작가들의 작품은 시대를 고발하고 삶의 단면을 기록하며, 황금성게임다운로드 때로는 사회 변화를 이끄는 역할까지 해왔죠. 특히 청소년기에 미술 작품을 감상하면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정서적 안정과 공감 능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해요. 이런 이유로 미술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또 하나의 언어라고 하죠. 고가람 학생모델과 전서진·정서우 학생기자가 천경자 화백을 통해 미술 감상은 단순히 보는 행위 릴게임신천지 를 넘어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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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이고 독보적인 여성화가 천경자
천경자(1924~2015) 화백은 생전에 많은 사랑을 받은 당대의 예술계 슈퍼스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흥미를 보였다고 전해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지는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색과 선은 독창적인 감성을 자아냈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죠. 194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한국전쟁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어요. 여성과 자연, 감정을 중심으로 한 인물화가 특징으로 꼽히며 사실적인 묘사보다 내면과 심상을 강조한 작품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천 화백이 이토록 유명해진 이유는 우아한 선과 정련된 색채, 세련된 형태 감각으로 전통적인 한국 회화를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며 독보적인 화풍을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 화백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70년대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쉽지 않았던 시기였죠. 그러나 그는 스스로가 당당했고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여성을 작품으로 보여줬고,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당대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됐죠.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73년 국내 1호 상업 갤러리인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입니다. 당시 천 화백의 작품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람객이 몰렸는데, 미술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최초의 전시로 여전히 회자되죠. 이렇듯 천 화백은 2015년 타계 전까지 국내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정서우·전서진 학생기자와 고가람(왼쪽부터) 학생모델이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미술관을 찾아 올해 탄생 101주년을 맞은 천경자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이에 서울미술관은 올해 천 화백 탄생 101주년이자 작고 10주기를 맞아, 그의 업적과 작품을 다시금 조명하고자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선보여요. 이번 전시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가 그린 회화 80점을 비롯해 삽화·여행기 사진·편지 등 작가의 삶을 총망라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을 반갑게 맞아준 서울미술관 김현주 전시기획팀장은 “천 화백의 작품을 통해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며 안내했죠.
“천 작가의 그림에서는 인물의 눈빛과 자세, 색채 배치가 특히 중요해요. 단순히 외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그 인물의 감정과 내면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죠. 이러한 화풍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김 팀장의 설명처럼 천경자는 단순한 화가를 넘어 한 시대의 미술적 흐름과 여성 작가의 가능성을 확장한 인물로 평가받아요. "천경자 화백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라는 질문에 소중 학생기자단은 "미인도요" "꽃과 여자가 많이 나와요" "색이 화려해요"라며 저마다의 느낌을 공유했죠.
천 작가의 여성초상화를 대표하는 작품 ‘고(孤)’는 사실 천경자 자신의 외로움을 상징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모두 천 화백의 특징을 잘 아네요. 천 화백의 예술 세계는 크게 꽃과 여인을 주로 한 채색화 시기와 그 이후 세계를 스케치해서 그린 풍물화 시기로 나뉠 수 있어요"라며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소개했죠. 1976년 완성된 대형 채색화로, 아프리카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킬리만자로와 초원을 배경으로 치타·얼룩말·사자 등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며 이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죠. "1970년대는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했는데요. 1974년, 천 작가는 20년간 재직했던 홍익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지의 세계인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당시 아프리카 여행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그는 킬리만자로 산과 초원, 동물들을 배경으로 낯선 감성을 더한 작품들을 선보였죠. 그 대표작이 바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와 ‘초원 Ⅱ’이고요."
‘초원 Ⅱ’는 아프리카 여행과 자전적 내용을 결합한 기행화이자 풍경화, 그리고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치타·얼룩말·물소·사자·영양·코끼리 등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아프리카의 드넓은 노란 들판과 오아시스 주변에 평화롭게 모여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죠. 작가만의 독특한 채색법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은 가까이에서 보면 석채로 인해 화면 전반이 은은하게 반짝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조해요. 더불어 이 작품은 한국 여성작가 최초로 20억원대의 경매가를 기록한 것으로도 주목받았습니다.
천 화백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미지의 세계 아프리카 초원을 담았다.
천 화백은 70세까지 총 13차례에 걸쳐 해외여행을 떠났고, 이를 토대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어요. 40대 후반 타히티 여행을 시작으로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을 거쳤으며, 50대에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과 킬리만자로를 횡단했죠. 그로부터 5년 후에는 인도와 아마존 밀림지대까지 누비며 자신만의 세계풍물기행문을 완성했고, 이를 통해 화려한 화풍을 정립했다고 전해져요. “그림뿐 아니라 글도 뛰어났던 천 화백은 당시 매주 신문에 풍물기행을 연재했는데, 지금과 달리 해외여행이 대중적이지 않았던 시절이어서인지 엄청난 인기였다고 해요.”
25년간 13번의 해외여행을 통해 천 화백은 당당하고 자기감정에 충실한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여성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화풍 역시 점차 강렬하게 변화했죠. 초기 작품에서는 차분하고 담백한 색감을 주로 사용했지만, 후기 작품에서는 강렬한 붉은색과 황금빛을 활용해 감정의 폭을 극대화했습니다. 천 화백의 여성초상화를 대표하는 작품 ‘고(孤)’를 가리킨 김 팀장은 “그림 속 여성의 기분을 유추해볼까요?”라고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질문했죠. 서우 학생기자와 가람 학생모델은 각각 “웃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빛이 슬퍼 보여요”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했어요.
거센 풍랑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끝내 자신만의 화풍을 이룩한 천 화백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한 소중 학생기자단.
“이 작품은 천 작가의 여성초상화를 대표하며 대중적으로도 가장 잘 알려진 그림 중 하나예요. 천경자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머리에 꽃을 얹은 여인’의 모습으로, 우수와 고독이 서린 듯 눈물을 글썽일 것 같은 슬픈 눈망울과 다문 입술 위에 얹힌 은은한 미소가 특징인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죠. 옆모습으로 그려진 여인의 눈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쪽 동공은 얼핏 관객을 향해 있는 듯 보이기도 하고요. 웃고 있지만 어딘지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오묘한 표정의 이 여인은 사실 천 화백 자신의 외로움을 상징한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천 화백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70년대는 여성 인권이 잘 보호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실제 모델을 그리며,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여성의 한과 욕망, 불안한 미래에 대한 꿈과 환상이 뒤섞인 모습을 솔직하게 담아냈는데, ‘고(孤)’가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말해주죠.
“천경자 작가님 이전에는 유명했던 여성 작가는 없었나요?” 가람 학생모델이 물었죠.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화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나혜석 작가가 있어요. 일제강점기 신여성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했죠. 일본 유학 후 조선에 서양화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으며, 과감한 붓 터치와 단순화된 대상,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확립했다고 평가받아요. 나 화백이 활동하던 시절은 여성 인권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방면에서 예술 활동을 펼쳤고, 그 계보가 천 화백으로 이어진 것이죠.”
1980년대 선보인 천 화백의 ‘막을 내리고’는 화려한 색채와 이국적인 여성이 눈길을 끈다.
이어 “천경자 작가님은 꽃과 여성을 많이 그렸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라는 서진 학생기자 질문에 김 팀장은 “꽃은 아름답지만 언젠가는 시들고, 영원히 아름다울 수는 없잖아요. 천 화백은 그런 꽃의 속성이 여성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성 역시 꽃처럼 아름답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이를 먹고 늙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고자 꽃을 자주 그렸다고 합니다. 또한 꽃과 여성을 그리며 큰 위안을 받았다고 해요”라고 설명했죠.
독보적인 작가로 명성을 쌓아온 천 화백에게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미인도 위작 논란’이죠. 이로 인해 오랜 시간 그의 작품 세계가 온전히 조명받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큰데요. 김 팀장은 이에 대해 "위작 논란에 집중하기보다는 천 화백 작품과 삶에 초점을 맞춰 전시를 관람했으면 좋겠다"며 천 화백이 사회에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화가였다는 사실을 언급했죠.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자신의 작품과 화구를 기증한 천 화백은 '나의 그림이 일반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고, 모든 저작권을 서울시에 위임했습니다. 이는 ‘평생을 바친 예술혼의 선물’로 불리며 큰 울림을 남겼죠. 이렇듯 천 화백은 시대를 앞서나간 예술가이자 여성으로서 예술의 주체가 된 선구자로,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천경자 화백 그림처럼 뚜렷한 개성을 담은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고가람 학생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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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화가·교수·삽화가·수필가 등 다방면 활약
천 화백이 활동하던 시절,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들과 출발선부터 달랐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각종 편견과 비하, 폄훼에 시달려야 했고, 그로 인해 좌절한 여성 작가들도 적지 않았죠. 그러나 천 화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끝내 자신만의 화풍을 이룩해냈으며, 또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이 도전한 예술가이기도 해요. 김 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종군화가에 이어 다양한 삽화를 그리며 책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고, 뛰어난 필력으로 수필가로도 활동했던 그의 여러 방면에서의 활약을 함께 조명했다고 강조했죠.
“1972년 6월, 흔히 월남전이라 불렀던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 군의 활약상을 기록하기 위해 정부가 10명의 미술가를 선발했는데, 그중 천 화백은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군용기를 타고 필리핀의 미군 기지를 거쳐 사이공으로 향했고, 약 20여 일을 머물며 맹호부대에 배치됐죠. 최전선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하는 동시에, 우거진 밀림과 이국적인 열대 식물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그 대표작이 바로 ‘꽃과 병사와 포성’입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글도 잘 쓴 천 화백은 여러 수필을 남겼다. 천 화백 수필집을 보는 전서진 학생기자.
이 작품에는 총을 든 우리 국군과 저편의 탱크 사이로 꽃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아련한 분홍빛 구름을 이루고, 대나무 잎으로 만든 전통 삼각 모자를 쓴 베트남 민가의 사람도 등장합니다. 꽃과 병사, 총을 한 화면에 배치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전쟁의 참혹함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이 작품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환상과 아름다움을 좇은 작가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겼다고 평가받아요.
“천 화백은 전쟁 중에도 이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주의 깊게 바라보며, 사이공 마을의 풍경을 담은 작품도 남겼습니다. 이는 ‘꽃과 병사와 포성’과는 또 다른 대비를 이루며 전쟁의 잔혹함을 더욱 부각한다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천 화백 작품 ‘청춘’을 관람한 정서우 학생기자는 화려한 색감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다음으로 소중 학생기자단은 천 화백이 참여한 삽화들이 전시된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죠. 1970년대는 ‘출판 미술’ ‘출판 예술’이라 불릴 정도로 화가들이 신문·잡지 등 출판물을 매개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였고, 천 화백 역시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해요. 그는 한국전쟁 당시의 통영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비극적 사랑과 내면을 그린 박경리 작가의 소설 『파시』 삽화를 맡으며 문인들과도 꾸준히 교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 팀장은 『월간 문학지성』 1973년 12월호 표지를 가리키며 “이 인물은 천 화백의 이웃으로 지냈던 시인 노천명입니다. ‘사슴’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노 시인은 사랑과 슬픔, 고독과 애수를 주제로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남겼는데, 천 화백 역시 그의 감성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 표지 작품은 노천명의 인품과 감수성, 사상이 모두 응결된 그림으로 평가받아요. 특히 노천명을 감싸듯 어루만지는 꽃 무리와 그 곁의 하얀 손은 문화적 유산을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천경자의 마음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라고 강조했어요.
“천경자 작가님은 다양한 그림을 그리셨는데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나요?”라는 가람 학생모델의 질문에 김 팀장은 “천 화백은 특정 대상에서 영감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인생을 성찰하며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떤 모습을 보고 ‘저걸 그리고 싶다’기보다는, ‘지금 내 마음이 너무 힘들다’ ‘이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 ‘스스로 위로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고 해요. 그래서 영감이라기보다, 천경자 마음속에서 그림의 소재가 흘러나왔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죠.
천경자 화백의 일상과 예술 세계에 대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설명해주는 서울미술관 김현주(맨 오른쪽) 전시기획팀장.
이어 서우 학생기자가 “천경자 작가님 그림을 보면 동양화가 아닌 서양화처럼 느껴지는데, 어떤 재료로 작업하셨나요?”라고 물어봤죠. “서양화는 유화 특유의 짙고 선명한 색감을 지녔지만, 동양화는 비교적 부드럽고 은은한 색을 사용하는데요. 동양화 재료를 사용한 천 화백의 작품이 서양화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덧칠’과 ‘석채’를 활용한 작업 방식 때문입니다.”
천 화백은 특히 돌가루로 만든 안료인 석채에 아교와 호분을 섞어 여러 번 덧칠하는 기법으로 유명했는데요. 이러한 방식은 색채의 깊이감은 물론 부피감과 질감까지 살려 화면의 밀도를 높였고, 그 결과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볼 땐 가까이서 보며 그 특유의 분위기를 느껴볼 필요가 있죠.
“이번 전시에서 가장 유의 깊게 봐야 할 작품과 감상 팁을 소개해 주세요.” 서진 학생기자의 말에 김 팀장은 “천경자 화백은 미인도와 꽃과 여인 그림뿐 아니라, 세계 여행을 통해 그린 다양한 풍경화, 전쟁 기록화, 책 삽화 등 폭넓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삶과 예술 세계 전반을 함께 느끼며 감상하신다면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이처럼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마주하는 경험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마음과 생각을 풍요롭게 하는 시간이 됐는데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이어 서울미술관 내 흥선대원군 별서 석파정으로 자리를 옮겨,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여운을 이어나갔죠. 동행취재=고가람(서울 송화초 4) 학생모델·전서진(서울 반원초 5)·정서우(서울 고명초 5) 학생기자
■ 천경자 화백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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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은 우아한 선과 정련된 색채, 세련된 형태 감각으로 전통적인 한국 회화를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1924년 전라남도 고흥 출생
1941년 도쿄 여자미술학교(현 일본여자미술대) 유학
1950~60년대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두각, 한국화계 대표 작가로 부상 대표작 '미인도', '여인의 초상'
1970년대 해외여행과 이국적 풍경 작품 다수 발표, 전성기 대표작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고(孤)’
1980년대 내면 탐구기, 감성적 서사 강화 대표작 '슬픈 전설', '그리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절필 선언
2015년 미국 뉴욕에서 별세 」
■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 기간 2026년 1월 25일(일)까지 장소 서울 종로구 부암동 201 서울미술관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월·화요일 휴관, 입장은 오후 5시 30분 마감) 관람료 성인 2만원, 학생 1만5000원, 미취학 아동 1만3000원 」
■ 자연 속에서 만나는 역사와 예술 ‘석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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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우·전서진 학생기자와 고가람 학생모델(왼쪽부터)이 천경자 작품의 여운을 안고 조선 시대 선비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공간 석파정을 방문했다.
조선 시대 선비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공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호 ‘석파(石坡)’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조선 후기 조성된 이곳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김흥근의 별장이었으나, 수려한 풍경과 자연의 정취에 매료된 흥선대원군이 이를 자신의 별장으로 삼으면서 오늘날의 석파정으로 이어졌죠.
정자와 사랑채, 안채, 별채 등으로 이루어진 석파정은 빼어난 자연에 둘러싸여 수많은 시인과 화가, 학자들이 찾던 공간이었다고 전해져요. 이들은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닦았다고 합니다. 석파정의 가치는 단순한 건축미에 그치지 않아요. 조선 시대의 정원은 권력자의 향락이나 사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사유와 학문을 나누는 장소였습니다. 특히 바위와 연못, 작은 다리와 정자의 배치에서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수양한다’는 조선 선비의 정신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죠.
이처럼 선비들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담아온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사후 흥친왕과 영선군, 이우에게 세습되어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에는 가톨릭에서 보육원으로 활용했죠. 20세기에 들어 여러 변화를 겪은 석파정은 1974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5호로 지정됐고, 2000년대 초반 서울시의 주도로 일반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정비됐습니다. 그 결과, 정원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대미술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는 서울미술관으로 재탄생하게 됐죠.
과거 선비들이 석파정에서 사색하며 지혜와 감성을 길렀다면, 오늘날의 관람객들은 이곳에서 작품과 마주하고 감정을 읽으며 역사와 예술을 아울러 소통합니다. 이를 통해 석파정은 창의적 사고를 확장하는 새로운 문화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
■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후기
「 이번 취재는 천경자 작가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천 작가님 작품은 제가 여태껏 본 그림 중 가장 색감이 진하고 화려했죠. 그림 속 사람의 눈빛과 감정 그리고 개성이 뚜렷했고요. 저는 천경자 작가님에 대해선 잘 몰랐고 그림만 조금 아는 정도라 그저 강렬한 그림을 작업한 작가로만 알았는데, 이번 취재를 통해 작가님의 그림은 물론 인생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작가님의 삶을 듣고 보니 자신의 인생을 그림에 표현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특히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화풍이나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등 다양한 기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저도 앞으로 천경자 작가님처럼 개성이 뚜렷하고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전시 관람 후 가을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석파정도 둘러보았는데 고즈넉한 서울시 풍경이 마치 그림 같아 한편의 작품을 본 듯했죠.
고가람(서울 송화초 4) 학생모델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가신 천경자 화백님의 개인전을 관람한 것은 그림을 좋아하는 제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천경자 화백님은 사랑과 이별, 네 자녀의 양육 등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그림을 통해 말했기에 화백님을 '화가'라기 보다는 '그림을 통한 이야기꾼' 또는 '작가'라고 부르고 싶어요.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세계 여행을 다니며 곳곳의 여성들을 특유의 화려한 색채로 표현한 것도 아름다웠죠. 또 늦가을 알록달록한 단풍에 둘러싸인 석파정은 '왕의 정원'답게 고즈넉하고 아름다웠어요. 고층 건물이 많은데도 석파정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경치는 절경이었는데 조선 시대의 풍경은 더욱 압도적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봤죠. 천경자 작가님은 물론 석파정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소중 독자분들께 천경자 작가님 그림을 감상하고 석파정 산책하는 것을 추천해요.
전서진(서울 반원초 5) 학생기자
소중 친구 여러분은 천경자 작가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천경자 작가는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가로 명성을 떨쳤어요. 전 세계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고 베트남 전쟁 때는 직접 전쟁터에 가서 종군화가로 활약하기도 했죠. 저는 천경자 작가님의 그림과 여러 이야기 중 특히 아름다운 색감이 기억에 남아요. 흔히 동양화 하면 한지에 먹물을 이용한 그림이 떠오르는데, 천 작가님 그림은 전혀 달랐어요. 동양화 재료를 썼어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잘 활용해 세련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해요. 천경자 작가가 활동했던 그 시절에는 얼마나 파격적이고 세련된 그림이었을까요. 당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다고 하는데, 그림을 보니 이해가 됐어요. 여러분도 천경자 작가 작고 10주기 특별전시회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에 들러 다양한 그림을 감상해 보세요.
정서우(서울 고명초 5) 학생기자 」
글=이보라 기자 lee.bora3@joins.com,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서울미술관 기자 admin@seastorygame.top
천경자 화백을 조명한 전시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찾은 전서진 학생기자와 고가람 학생모델, 정 모바일야마토 서우 학생기자(왼쪽부터).
미술 작품은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그린 개인의 감정을 넘어, 작품이 탄생한 시대의 정치·사회·문화적 배경과 역사를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작품을 통해 작가가 당시 어떤 고민과 질문을 품었는지 유추할 수 있고요. 작가들의 작품은 시대를 고발하고 삶의 단면을 기록하며, 황금성게임다운로드 때로는 사회 변화를 이끄는 역할까지 해왔죠. 특히 청소년기에 미술 작품을 감상하면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정서적 안정과 공감 능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해요. 이런 이유로 미술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또 하나의 언어라고 하죠. 고가람 학생모델과 전서진·정서우 학생기자가 천경자 화백을 통해 미술 감상은 단순히 보는 행위 릴게임신천지 를 넘어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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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이고 독보적인 여성화가 천경자
천경자(1924~2015) 화백은 생전에 많은 사랑을 받은 당대의 예술계 슈퍼스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흥미를 보였다고 전해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지는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색과 선은 독창적인 감성을 자아냈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죠. 194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한국전쟁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어요. 여성과 자연, 감정을 중심으로 한 인물화가 특징으로 꼽히며 사실적인 묘사보다 내면과 심상을 강조한 작품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천 화백이 이토록 유명해진 이유는 우아한 선과 정련된 색채, 세련된 형태 감각으로 전통적인 한국 회화를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며 독보적인 화풍을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 화백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70년대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쉽지 않았던 시기였죠. 그러나 그는 스스로가 당당했고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여성을 작품으로 보여줬고,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당대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됐죠.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73년 국내 1호 상업 갤러리인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입니다. 당시 천 화백의 작품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람객이 몰렸는데, 미술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최초의 전시로 여전히 회자되죠. 이렇듯 천 화백은 2015년 타계 전까지 국내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정서우·전서진 학생기자와 고가람(왼쪽부터) 학생모델이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미술관을 찾아 올해 탄생 101주년을 맞은 천경자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이에 서울미술관은 올해 천 화백 탄생 101주년이자 작고 10주기를 맞아, 그의 업적과 작품을 다시금 조명하고자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선보여요. 이번 전시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가 그린 회화 80점을 비롯해 삽화·여행기 사진·편지 등 작가의 삶을 총망라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을 반갑게 맞아준 서울미술관 김현주 전시기획팀장은 “천 화백의 작품을 통해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며 안내했죠.
“천 작가의 그림에서는 인물의 눈빛과 자세, 색채 배치가 특히 중요해요. 단순히 외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그 인물의 감정과 내면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죠. 이러한 화풍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김 팀장의 설명처럼 천경자는 단순한 화가를 넘어 한 시대의 미술적 흐름과 여성 작가의 가능성을 확장한 인물로 평가받아요. "천경자 화백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라는 질문에 소중 학생기자단은 "미인도요" "꽃과 여자가 많이 나와요" "색이 화려해요"라며 저마다의 느낌을 공유했죠.
천 작가의 여성초상화를 대표하는 작품 ‘고(孤)’는 사실 천경자 자신의 외로움을 상징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모두 천 화백의 특징을 잘 아네요. 천 화백의 예술 세계는 크게 꽃과 여인을 주로 한 채색화 시기와 그 이후 세계를 스케치해서 그린 풍물화 시기로 나뉠 수 있어요"라며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소개했죠. 1976년 완성된 대형 채색화로, 아프리카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킬리만자로와 초원을 배경으로 치타·얼룩말·사자 등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며 이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죠. "1970년대는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했는데요. 1974년, 천 작가는 20년간 재직했던 홍익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지의 세계인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당시 아프리카 여행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그는 킬리만자로 산과 초원, 동물들을 배경으로 낯선 감성을 더한 작품들을 선보였죠. 그 대표작이 바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와 ‘초원 Ⅱ’이고요."
‘초원 Ⅱ’는 아프리카 여행과 자전적 내용을 결합한 기행화이자 풍경화, 그리고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치타·얼룩말·물소·사자·영양·코끼리 등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아프리카의 드넓은 노란 들판과 오아시스 주변에 평화롭게 모여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죠. 작가만의 독특한 채색법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은 가까이에서 보면 석채로 인해 화면 전반이 은은하게 반짝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조해요. 더불어 이 작품은 한국 여성작가 최초로 20억원대의 경매가를 기록한 것으로도 주목받았습니다.
천 화백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미지의 세계 아프리카 초원을 담았다.
천 화백은 70세까지 총 13차례에 걸쳐 해외여행을 떠났고, 이를 토대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어요. 40대 후반 타히티 여행을 시작으로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을 거쳤으며, 50대에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과 킬리만자로를 횡단했죠. 그로부터 5년 후에는 인도와 아마존 밀림지대까지 누비며 자신만의 세계풍물기행문을 완성했고, 이를 통해 화려한 화풍을 정립했다고 전해져요. “그림뿐 아니라 글도 뛰어났던 천 화백은 당시 매주 신문에 풍물기행을 연재했는데, 지금과 달리 해외여행이 대중적이지 않았던 시절이어서인지 엄청난 인기였다고 해요.”
25년간 13번의 해외여행을 통해 천 화백은 당당하고 자기감정에 충실한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여성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화풍 역시 점차 강렬하게 변화했죠. 초기 작품에서는 차분하고 담백한 색감을 주로 사용했지만, 후기 작품에서는 강렬한 붉은색과 황금빛을 활용해 감정의 폭을 극대화했습니다. 천 화백의 여성초상화를 대표하는 작품 ‘고(孤)’를 가리킨 김 팀장은 “그림 속 여성의 기분을 유추해볼까요?”라고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질문했죠. 서우 학생기자와 가람 학생모델은 각각 “웃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빛이 슬퍼 보여요”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했어요.
거센 풍랑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끝내 자신만의 화풍을 이룩한 천 화백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한 소중 학생기자단.
“이 작품은 천 작가의 여성초상화를 대표하며 대중적으로도 가장 잘 알려진 그림 중 하나예요. 천경자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머리에 꽃을 얹은 여인’의 모습으로, 우수와 고독이 서린 듯 눈물을 글썽일 것 같은 슬픈 눈망울과 다문 입술 위에 얹힌 은은한 미소가 특징인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죠. 옆모습으로 그려진 여인의 눈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쪽 동공은 얼핏 관객을 향해 있는 듯 보이기도 하고요. 웃고 있지만 어딘지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오묘한 표정의 이 여인은 사실 천 화백 자신의 외로움을 상징한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천 화백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70년대는 여성 인권이 잘 보호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실제 모델을 그리며,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여성의 한과 욕망, 불안한 미래에 대한 꿈과 환상이 뒤섞인 모습을 솔직하게 담아냈는데, ‘고(孤)’가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말해주죠.
“천경자 작가님 이전에는 유명했던 여성 작가는 없었나요?” 가람 학생모델이 물었죠.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화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나혜석 작가가 있어요. 일제강점기 신여성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했죠. 일본 유학 후 조선에 서양화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으며, 과감한 붓 터치와 단순화된 대상,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확립했다고 평가받아요. 나 화백이 활동하던 시절은 여성 인권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방면에서 예술 활동을 펼쳤고, 그 계보가 천 화백으로 이어진 것이죠.”
1980년대 선보인 천 화백의 ‘막을 내리고’는 화려한 색채와 이국적인 여성이 눈길을 끈다.
이어 “천경자 작가님은 꽃과 여성을 많이 그렸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라는 서진 학생기자 질문에 김 팀장은 “꽃은 아름답지만 언젠가는 시들고, 영원히 아름다울 수는 없잖아요. 천 화백은 그런 꽃의 속성이 여성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성 역시 꽃처럼 아름답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이를 먹고 늙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고자 꽃을 자주 그렸다고 합니다. 또한 꽃과 여성을 그리며 큰 위안을 받았다고 해요”라고 설명했죠.
독보적인 작가로 명성을 쌓아온 천 화백에게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미인도 위작 논란’이죠. 이로 인해 오랜 시간 그의 작품 세계가 온전히 조명받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큰데요. 김 팀장은 이에 대해 "위작 논란에 집중하기보다는 천 화백 작품과 삶에 초점을 맞춰 전시를 관람했으면 좋겠다"며 천 화백이 사회에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화가였다는 사실을 언급했죠.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자신의 작품과 화구를 기증한 천 화백은 '나의 그림이 일반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고, 모든 저작권을 서울시에 위임했습니다. 이는 ‘평생을 바친 예술혼의 선물’로 불리며 큰 울림을 남겼죠. 이렇듯 천 화백은 시대를 앞서나간 예술가이자 여성으로서 예술의 주체가 된 선구자로,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천경자 화백 그림처럼 뚜렷한 개성을 담은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고가람 학생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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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화가·교수·삽화가·수필가 등 다방면 활약
천 화백이 활동하던 시절,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들과 출발선부터 달랐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각종 편견과 비하, 폄훼에 시달려야 했고, 그로 인해 좌절한 여성 작가들도 적지 않았죠. 그러나 천 화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끝내 자신만의 화풍을 이룩해냈으며, 또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이 도전한 예술가이기도 해요. 김 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종군화가에 이어 다양한 삽화를 그리며 책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고, 뛰어난 필력으로 수필가로도 활동했던 그의 여러 방면에서의 활약을 함께 조명했다고 강조했죠.
“1972년 6월, 흔히 월남전이라 불렀던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 군의 활약상을 기록하기 위해 정부가 10명의 미술가를 선발했는데, 그중 천 화백은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군용기를 타고 필리핀의 미군 기지를 거쳐 사이공으로 향했고, 약 20여 일을 머물며 맹호부대에 배치됐죠. 최전선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하는 동시에, 우거진 밀림과 이국적인 열대 식물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그 대표작이 바로 ‘꽃과 병사와 포성’입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글도 잘 쓴 천 화백은 여러 수필을 남겼다. 천 화백 수필집을 보는 전서진 학생기자.
이 작품에는 총을 든 우리 국군과 저편의 탱크 사이로 꽃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아련한 분홍빛 구름을 이루고, 대나무 잎으로 만든 전통 삼각 모자를 쓴 베트남 민가의 사람도 등장합니다. 꽃과 병사, 총을 한 화면에 배치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전쟁의 참혹함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이 작품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환상과 아름다움을 좇은 작가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겼다고 평가받아요.
“천 화백은 전쟁 중에도 이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주의 깊게 바라보며, 사이공 마을의 풍경을 담은 작품도 남겼습니다. 이는 ‘꽃과 병사와 포성’과는 또 다른 대비를 이루며 전쟁의 잔혹함을 더욱 부각한다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천 화백 작품 ‘청춘’을 관람한 정서우 학생기자는 화려한 색감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다음으로 소중 학생기자단은 천 화백이 참여한 삽화들이 전시된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죠. 1970년대는 ‘출판 미술’ ‘출판 예술’이라 불릴 정도로 화가들이 신문·잡지 등 출판물을 매개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였고, 천 화백 역시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해요. 그는 한국전쟁 당시의 통영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비극적 사랑과 내면을 그린 박경리 작가의 소설 『파시』 삽화를 맡으며 문인들과도 꾸준히 교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 팀장은 『월간 문학지성』 1973년 12월호 표지를 가리키며 “이 인물은 천 화백의 이웃으로 지냈던 시인 노천명입니다. ‘사슴’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노 시인은 사랑과 슬픔, 고독과 애수를 주제로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남겼는데, 천 화백 역시 그의 감성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 표지 작품은 노천명의 인품과 감수성, 사상이 모두 응결된 그림으로 평가받아요. 특히 노천명을 감싸듯 어루만지는 꽃 무리와 그 곁의 하얀 손은 문화적 유산을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천경자의 마음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라고 강조했어요.
“천경자 작가님은 다양한 그림을 그리셨는데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나요?”라는 가람 학생모델의 질문에 김 팀장은 “천 화백은 특정 대상에서 영감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인생을 성찰하며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떤 모습을 보고 ‘저걸 그리고 싶다’기보다는, ‘지금 내 마음이 너무 힘들다’ ‘이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 ‘스스로 위로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고 해요. 그래서 영감이라기보다, 천경자 마음속에서 그림의 소재가 흘러나왔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죠.
천경자 화백의 일상과 예술 세계에 대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설명해주는 서울미술관 김현주(맨 오른쪽) 전시기획팀장.
이어 서우 학생기자가 “천경자 작가님 그림을 보면 동양화가 아닌 서양화처럼 느껴지는데, 어떤 재료로 작업하셨나요?”라고 물어봤죠. “서양화는 유화 특유의 짙고 선명한 색감을 지녔지만, 동양화는 비교적 부드럽고 은은한 색을 사용하는데요. 동양화 재료를 사용한 천 화백의 작품이 서양화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덧칠’과 ‘석채’를 활용한 작업 방식 때문입니다.”
천 화백은 특히 돌가루로 만든 안료인 석채에 아교와 호분을 섞어 여러 번 덧칠하는 기법으로 유명했는데요. 이러한 방식은 색채의 깊이감은 물론 부피감과 질감까지 살려 화면의 밀도를 높였고, 그 결과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볼 땐 가까이서 보며 그 특유의 분위기를 느껴볼 필요가 있죠.
“이번 전시에서 가장 유의 깊게 봐야 할 작품과 감상 팁을 소개해 주세요.” 서진 학생기자의 말에 김 팀장은 “천경자 화백은 미인도와 꽃과 여인 그림뿐 아니라, 세계 여행을 통해 그린 다양한 풍경화, 전쟁 기록화, 책 삽화 등 폭넓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삶과 예술 세계 전반을 함께 느끼며 감상하신다면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이처럼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마주하는 경험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마음과 생각을 풍요롭게 하는 시간이 됐는데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이어 서울미술관 내 흥선대원군 별서 석파정으로 자리를 옮겨,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여운을 이어나갔죠. 동행취재=고가람(서울 송화초 4) 학생모델·전서진(서울 반원초 5)·정서우(서울 고명초 5) 학생기자
■ 천경자 화백 약력
「
천경자 화백은 우아한 선과 정련된 색채, 세련된 형태 감각으로 전통적인 한국 회화를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1924년 전라남도 고흥 출생
1941년 도쿄 여자미술학교(현 일본여자미술대) 유학
1950~60년대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두각, 한국화계 대표 작가로 부상 대표작 '미인도', '여인의 초상'
1970년대 해외여행과 이국적 풍경 작품 다수 발표, 전성기 대표작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고(孤)’
1980년대 내면 탐구기, 감성적 서사 강화 대표작 '슬픈 전설', '그리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절필 선언
2015년 미국 뉴욕에서 별세 」
■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 기간 2026년 1월 25일(일)까지 장소 서울 종로구 부암동 201 서울미술관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월·화요일 휴관, 입장은 오후 5시 30분 마감) 관람료 성인 2만원, 학생 1만5000원, 미취학 아동 1만3000원 」
■ 자연 속에서 만나는 역사와 예술 ‘석파정’
「
정서우·전서진 학생기자와 고가람 학생모델(왼쪽부터)이 천경자 작품의 여운을 안고 조선 시대 선비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공간 석파정을 방문했다.
조선 시대 선비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공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호 ‘석파(石坡)’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조선 후기 조성된 이곳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안동 김씨 김흥근의 별장이었으나, 수려한 풍경과 자연의 정취에 매료된 흥선대원군이 이를 자신의 별장으로 삼으면서 오늘날의 석파정으로 이어졌죠.
정자와 사랑채, 안채, 별채 등으로 이루어진 석파정은 빼어난 자연에 둘러싸여 수많은 시인과 화가, 학자들이 찾던 공간이었다고 전해져요. 이들은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닦았다고 합니다. 석파정의 가치는 단순한 건축미에 그치지 않아요. 조선 시대의 정원은 권력자의 향락이나 사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사유와 학문을 나누는 장소였습니다. 특히 바위와 연못, 작은 다리와 정자의 배치에서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수양한다’는 조선 선비의 정신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죠.
이처럼 선비들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담아온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사후 흥친왕과 영선군, 이우에게 세습되어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에는 가톨릭에서 보육원으로 활용했죠. 20세기에 들어 여러 변화를 겪은 석파정은 1974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25호로 지정됐고, 2000년대 초반 서울시의 주도로 일반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정비됐습니다. 그 결과, 정원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대미술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는 서울미술관으로 재탄생하게 됐죠.
과거 선비들이 석파정에서 사색하며 지혜와 감성을 길렀다면, 오늘날의 관람객들은 이곳에서 작품과 마주하고 감정을 읽으며 역사와 예술을 아울러 소통합니다. 이를 통해 석파정은 창의적 사고를 확장하는 새로운 문화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
■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후기
「 이번 취재는 천경자 작가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천 작가님 작품은 제가 여태껏 본 그림 중 가장 색감이 진하고 화려했죠. 그림 속 사람의 눈빛과 감정 그리고 개성이 뚜렷했고요. 저는 천경자 작가님에 대해선 잘 몰랐고 그림만 조금 아는 정도라 그저 강렬한 그림을 작업한 작가로만 알았는데, 이번 취재를 통해 작가님의 그림은 물론 인생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작가님의 삶을 듣고 보니 자신의 인생을 그림에 표현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특히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화풍이나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등 다양한 기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저도 앞으로 천경자 작가님처럼 개성이 뚜렷하고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전시 관람 후 가을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석파정도 둘러보았는데 고즈넉한 서울시 풍경이 마치 그림 같아 한편의 작품을 본 듯했죠.
고가람(서울 송화초 4) 학생모델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가신 천경자 화백님의 개인전을 관람한 것은 그림을 좋아하는 제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천경자 화백님은 사랑과 이별, 네 자녀의 양육 등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그림을 통해 말했기에 화백님을 '화가'라기 보다는 '그림을 통한 이야기꾼' 또는 '작가'라고 부르고 싶어요.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세계 여행을 다니며 곳곳의 여성들을 특유의 화려한 색채로 표현한 것도 아름다웠죠. 또 늦가을 알록달록한 단풍에 둘러싸인 석파정은 '왕의 정원'답게 고즈넉하고 아름다웠어요. 고층 건물이 많은데도 석파정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경치는 절경이었는데 조선 시대의 풍경은 더욱 압도적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봤죠. 천경자 작가님은 물론 석파정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소중 독자분들께 천경자 작가님 그림을 감상하고 석파정 산책하는 것을 추천해요.
전서진(서울 반원초 5) 학생기자
소중 친구 여러분은 천경자 작가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천경자 작가는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가로 명성을 떨쳤어요. 전 세계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고 베트남 전쟁 때는 직접 전쟁터에 가서 종군화가로 활약하기도 했죠. 저는 천경자 작가님의 그림과 여러 이야기 중 특히 아름다운 색감이 기억에 남아요. 흔히 동양화 하면 한지에 먹물을 이용한 그림이 떠오르는데, 천 작가님 그림은 전혀 달랐어요. 동양화 재료를 썼어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잘 활용해 세련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해요. 천경자 작가가 활동했던 그 시절에는 얼마나 파격적이고 세련된 그림이었을까요. 당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다고 하는데, 그림을 보니 이해가 됐어요. 여러분도 천경자 작가 작고 10주기 특별전시회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에 들러 다양한 그림을 감상해 보세요.
정서우(서울 고명초 5) 학생기자 」
글=이보라 기자 lee.bora3@joins.com,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서울미술관 기자 admin@seastorygame.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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